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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일의 특허출원 인사이트

나는 아르고를 타고 영웅들과 모험을 떠나는 이아손을 좋아한다. 나도 배를 타고 모험을 떠나고 싶었지만, 배를 엄청나게 싫어하는 와이프 덕분에 배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고, 아들과 와이프가 한 달가량 캐나다에 머물 때 친구랑 보길도로 여행을 떠났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배를 30분정도 타니, 배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2003년부터 2023년까지 21년 동안 변리사로 일하고 있다. 대한민국 변리사는 대략
1)국내기업의 특허권을 관리하는 일(1번),
2)해외기업의 특허권을 관리하는 일(2번),
3)국내기업 및 해외기업 특허권, 상표권 및 디자인권의 소송을 담당하는 일(3번),
4)국내기업이나 해외기업의 상표권이나 디자인권을 관리하는 일(4번)
4가지 중 어느 하나를 하게 될 것이다.
나는 거의 대부분을 ‘1번’에 종사했다. 1번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국내기업의 엔지니어가 한 발명을 충분히 이해한 후에 이미 출원되어 있는 선행 발명과 차이점을 부각시켜 특허 명세서 초안을 쓰는 일이다. 한편, 2번에서는 이미 해외기업의 나라에서 출원된 특허 명세서를 한글로 정확하게 번역하여 한국 특허법에 대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본질적으로, 변리사는 법률가이지만, 강력한 특허권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가장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은 발명자가 기재한 발명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발명 내용을 글로써 대한민국 특허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구성 요건의 테두리 안에서 가장 넓게 정의해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변리사의 인사이트는 클라이언트가 착안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가치 있는 특허권을 포함하여 지식재산권을 창출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 특허권과 논문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대부분의 발명자들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착안해내면, 자신들이 엄청난 특허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논문과 특허권의 가장 큰 차이는 논문은 종래의 연구 주제에 비해서 새로운 것이 포함되어 있으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만, 특허권은 새로운 것에 더해 시장에서 수요가 있어야지만 특허로서의 가치가 존재한다. 이점을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것도 변리사의 역할이다.
결국, 변리사의 인사이트는 클라이언트가 착안하고 있는 지식을 시장에서 수요가 있는 지식 재산권으로 창출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종일 변리사 프로필

1971년에 태어나 1977년 2월까지는 전라남도 해남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아버지를 따라 사택에서 살았다. 4명의 누나와 외아들인 나를 포함하여 4녀1남 중에서 3명의 누님은 광주와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외아들인 나를 광주에서 교육시키기 위해서 1977년 2월 하순 즈음에 광주로 이사했다. 그때에 아버지는 해남에서 홀로 자취를 하셨다.
1977년부터 1989년 2월까지 광주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및 고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시절 가장 생각나는 사건은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항쟁이다. 우리집은 항쟁이 치열했던 시내에서 살짝 떨어진 변두리 근방이고, 외곽에서 군인들이 시내로 진군하는 초입에 위치하고 있어서, 집 주변은 군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나는 1980년 5월 19일부터 학교를 가지 않아서 그 당시에는 좋았다. 이 사건의 실체는 대학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다.
중학교 시절에는 ‘과학입국’이라는 프로파간다가 학교를 도배하고 있어서, 과학부에 가입해야만 주류가 될 수 있었다. 나도 과학부에 가입했고, 학교 대표로 전남 교육청에서 준비했던 과학 영재 교육을 받았고, 나 자신이 과학 영재인줄 알았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1987년 여름 엄청나게 시끄러웠고, 그해 겨울에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 우리사회에도 민주화가 될 것으로 엄청나게 기대했으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어 엄청나게 낙담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1988년 12월 16일 금요일 고대 과도관에서 전자공학과를 입학하기 위해서 학력고사를 치렀다. 그 당시에는 선지원 후시험 시스템이라서 SKY 지원자들의 상당수가 재수를 해야만 했다. 처음에 조교 형들이 과도관을 안내해 줄 때 나는 고대 부속고등학교인 줄 알았다.
대학 다니는 내내 나는 방황했다. 공부보다는 과외에 훨씬 더 관심을 뒀고, 사회 운동은 살짝(?) 두려워서 갤러리로 머물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보신주의자였다. 고대라는 상아탑 분위기에 취해서 9학기 내내 술에 쩔어 살았다. 9학기를 다닌 이유는 2학년 1학기 및 2학기에 학사경고를 맞았기 때문이다.
1994년에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고대 전자공학과 대학원 시험을 봤다. 특별히 공부에 취미는 없었지만, 그 당시에는 대학원에 입학해야지만 주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충 시험만 봐도 합격할 줄 알았지만, 보기 좋게(?) 낙방했다. 어쩔 수 없이 삼성전자 반도체 분야에 입사했다. 내가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고, 고대를 입학한 덕분에 학과 사무실에는 삼성전자, 현대전자, LG전자, 대우전자 등등 국내 유수기업의 입사원서가 쌓여 있었고, 면접만 무난하게 치르면 거의 다 합격했다. 삼성전자의 생활은 빡빡했다. 군대 생활보다 더 힘들었다. 그 해 여름 또 다시 고대 전자공학과 대학원 시험을 봤다. 또 떨어졌다. 너무 창피해서 8월 즈음 6개월의 삼성전자를 마무리하고 백수가 됐다. 아마도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김일성이 사망했던 것 같고, 유난히 여름 내내 무더웠다. 열대야라는 말이 처음으로 유행했다.
1994년 겨울에 고대 전자공학과 대학원에 운좋게 합격했다. 나의 대학원 생활은 달콤했다. 1995년, 1996년 대한민국은 엄청난 호황이었고, ‘카이스트’라는 드라마로 인해서 전자공학과 대학원생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 달콤함을 만끽하기 위해서 박사과정을 지원했다. 입학시험은 합격했지만, 현대 전자에서 박사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에서 탈락했다. 박사 과정을 진학하기 위해서는 석사과정 중에 받은 장학금(대략 2100만원)을 갚아야만 했으므로,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현대 전자에 입사했다.
1997년 1월 20일 이천에 있는 현대 전자에 입사했다. 어쩔 수 없이 입사해서, 회사에는 애착은 없었다. 나의 유일한 희망은 미국 유학이었다. GRE랑 TOEFL을 준비했다. 박정 어학원을 다니면서 유학 준비를 했지만, 과연 내가 미국으로 유학갈 수 있을지 의심했다. 11월부터 사회분위가 심상치 않았다. 10월에 GRE 시험을 보기 위해서 120달러의 응시료를 지불할 때는 환율이 750원/달러여서 10만원을 내면 살짝 몇 천원을 거슬러줬지만, 이듬해 2월에는 환율이 2200원/달러여서 25만원 이상을 내야만 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유학의 꿈을 접었다.
1998년 4월 즈음에 현대전자를 그만뒀다. 형식은 명예퇴직이었지만, 실질은 권고사직이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나는 20개월(1994년 6개월, 1997년부터 1998년 15개월)의 엔지니어 생활을 미련 없이 정리하고 변리사 시험을 준비했다.
1998년 7월부터 대학원 도서관에서 변리사 시험을 준비했다. 1999년 변리사 1차 시험에 떨어졌다. 처음으로 좌절을 맛봤다. 그 전에 떨어졌을 때는 내가 맘을 먹지 않아서 떨어졌다고 생각해서 좌절하지 않았다.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인생을 걸어야만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변리사 1차 시험을 붙기 위해서 일본어를 공부해서 2000년 변리사 1차 시험을 가볍게 통과했다. 변리사 2차 시험 과목은 법이 4과목이고, 전자공학 전공이 2과목이었고, 법 4과목은 재미있었다. 하지만 2001년 변리사 2차 시험 과목 중에서 상표법을 38점 받아서 과락으로 떨어졌다. 이듬해 2002년 월드컵을 보면서 변리사 1차 및 2차를 통과했다.
2003년 3월부터 2006년 4월까지 삼성전자엘지 디스플레이를 담당하는 특허법인에서 변리사로 근무하다가 2006년 5월부터 2007년 12월 특허청 심사관으로 일했다. 2008년 1월부터 개업하여 지금까지 변리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